전문가칼럼

미안해하지 않을 용기

꿀이엄마 │ 2023-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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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꽤 자신 있어 하는 특기, 바로 영혼 없이 사과하기입니다. 1 자폐아들을 키우면서 사과는 거의 달인 급으로 도가 텄거든요. 꿀이는 기분이 좋든 나쁘든 각성이 높아지면 큰소리를 내거나 박수를 마구 칩니다. 쿵쾅쿵쾅 뛰거나 킹콩처럼 가슴을 퍽퍽 칠 때도 있어요. 덩치 큰 청년의 돌발행동을 마주한 이름 모를 이웃들은 흠칫 놀라서 의문의 눈빛을 보냅니다. 그때 자동으로 사과준비하시고, 쏘세요!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어색하게 웃으면서, 재빨리 자리를 뜨는 동시에 죄송합니다하는 거죠. 우리 아이가 당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일도, 업무를 방해한 일도 없지만, 당신의 평온한 일상을 깨고 잠시 잠깐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의미랄까요. 아니, 좀 더 솔직해지자면 누군가 이유를 묻거나, 깊이 관심갖기 전에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주문처럼 사용했던 것 같아요. “! 나 사과했다. 됐지? 맞아. 우리 애 그런 상태야. 그러니까 우리한테 신경 꺼줘결국 사과는 예의를 가장한 제 무기였던 셈입니다.

 

하루에도 열두번씩 숨쉬듯 반복돼온 사과는 결국 습관을 넘어 제 정체성이 되어버렸어요. 자폐성향을 가진 아이를 키우는게 사과할 일이고, 사과의 원인제공자가 결국 제 귀한 아이가 되는 이 웃픈 상황에 문제의식 조차 없이 살았던 겁니다. 그런 제가 정신을 차리게 된 건 미국에서 경험한 작은 사건 때문이었어요.

 

미국 남부의 작은 도시에서 꿀이와 함께 반년동안 머물 때 매일 동네 YMCA에 수영하러 갔었는데, 가뜩이나 소리가 왕왕 울리는 수영장에서 꿀이가 갑자기 가슴을 퍽퍽 치면서 소리를 지르는 거에요. 제 사과는 파파고를 거쳐 자동 발사됐습니다. “아임 쏘 쏘리그러자 한쪽에서 아쿠아로빅하던 백발의 여사님이 저에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 오지마! 오지마! 영어로 어떻게 설명하지? 결국 나라망신시키고 쫓겨나는 건가?’ 긴장하고 있을 때 그분이 제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미안하다고 하지 마. 네 아이는 특별할 뿐이잖아

 

! 뒤통수를 세게 맞으면 이런 느낌일까요? 생전 처음 본 미국 아주머니가 건넨 그 말 한마디에 저는 무장해제되고 말았습니다.


자폐 최고 권위자인 배리 프리전트의 저서 독특해도 괜찮아’(예문아카이브, 2016) 서문에 이런 말이 있어요.


자폐는 병이 아니다. 사는 방식이 다른 것 뿐이다. 우리는 자폐를 치료하려 하지 말고 그냥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자폐를 이해하는 방식을 전환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귀를 기울이고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이들도 자신이 처한 상황과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이들의 능력을 키우고, 필요한 기술을 가르치고, 위기극복 전략을 다지게 하고, 걱정이 있을 때 나오던 행동 대신 바람직하게 행동하도록 도와야 한다”(요약발췌)


최근 발간된 자폐 스펙트럼과 하이퍼월드’(눌민)이 저자 이케가미 에이코도 자폐를 장애가 아닌 개성으로 봐야 하며, 자폐인들을 사물을 보는 방식이나 스타일이 우리와 다른신경다양성 사회의 소수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제 아이가 가진 자폐성향은 질병도, 단점도, 범죄도 아니에요. 그저 개성일 뿐이죠. 아이의 개성을 두고 부모가 사과하는 일이 어디 있나요? “우리 아이가 똥꼬발랄해서 죄송합니다”, “제 아들이 ENFP여서 죄송합니다말이 안되죠? 제 아이가 자폐라서 죄송하다고 사과하는건 이와 같은 맥락이란걸 미국에서 마주친 귀인이 저에게 알려주신 겁니다. 저는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게 아니라 사과해선 안되는 거였습니다. 제 마음 편하려고 방패막이처럼 썼던 사과가 결국은 아무 죄 없는, 그저 개성이 강한 제 아이를 죄인으로 만드는 일이었단 걸 깨닫는 순간이었어요.

 

비굴하게 사과하면서 회피하는 대신 저는 이제 아이의 개성을 당당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엄마가 되려 해요. “죄송 금지”. 동방예의지국에서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사는 걸 지상과제로 삼아온 40여년의 세월이 있기에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미안해 하지 않을용기를 내보려 합니다. “Don’t be sorry, be happy” 자폐는 그저 개성일 뿐이므로..



꿀이엄마 (자폐 블로거 / BC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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