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성장애인에게 쉬운 언어란?
김석주 │ 2024-03-20 HIT 5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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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석주 (자폐청년의 부모/ 음악치료사/ 발달장애지원전문가포럼 교육위원) 얼마 전 집을 이사했다. 자폐성 장애를 가진 스물 여덟 살 아들은 새로운 변화에 민감하기에 두어 달 전부터 이사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나눴다. 다행히 몇 차례 이사를 해보았고 해마다 3월이면 학교나 학년이 바뀌는 경험에 익숙했기에, 3월부터 다른 집에서 산다는 설명을 잘 받아들였다. 아들은 스스로 이사 준비를 하며, 집안의 가구와 물건 리스트를 메모했다. “밥통, 전자렌지, 냉장고, 드럼세탁기, 제트건조기, 쇼파, 장롱, 온풍기, 책상, 피아노, TV, 침대 2개, 선풍기, 가습기, 의자 6개, 식탁, 전부 다 가져갈 거에요.” 매일 나에게 메모를 확인시켰고, 이사 가기 전날에는 직접 세탁기 호스를 풀고, 가전제품의 전기코드를 다 뽑아놓았다. 이삿날 아침에 인부들이 짐을 옮기는 모습을 본 후, 아들은 평소처럼 복지관으로 등원했다가 저녁엔 새 집으로 들어왔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길과 새 현관 비밀번호 터치를 반복해 보았고, 집 안에 배치된 가구들을 눈으로 살피고, 모든 가전제품의 전기코드를 일일이 꽂아서 켜지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불들을 여름칸과 겨울칸으로 나눠서 정리했고, 자신의 옷장에서 봄잠옷을 꺼내 입었다. 이제 3월 봄이 되었으니, 겨울용 수면잠옷을 바꿔입은 것이었다. 아들은 계절과 성별, 용도에 따라 옷을 구분해 입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환절기 때 어떤 날은 점퍼를 입으랬다가, 어떤 날은 벗으랬다가, 긴소매를 입으라, 반소매를 입으라, 아침마다 바뀌는 상황을 혼란스러워했다. 그래서, 아들의 숫자 인지력을 활용해 옷을 구분시켜 보았다. 날씨앱으로 오전, 오후의 기온과 눈, 비, 맑음을 확인할 수 있으니, 기온이 18도 이상일 때는 티셔츠만 입기, 10도 이하일 때는 두꺼운 점퍼 입기, 오전에는 맑지만 오후에 비가 오면 우산 챙겨가기 등을 스스로 확인하고서야 날마다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발달장애인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누군가의 지시 없이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태도의 형성이다. 부모나 교사가 없는 상황에서도 추운 겨울에 털점퍼를 꺼내입을 수 있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복지관이나 직장에 갈 수 있고,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사고, 배 고플 때 밥을 짓거나 라면 정도는 끓여먹을 수 있어야 한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러면 된다, 안된다.” 라는 지시에 순종만 하거나 보호자에게 평생 의존하도록 길들여서는 안된다. 타인과 의견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고, 위험을 겪을 수도 있고, 때로는 실수와 실패를 통해서만 배우는 것들도 있다. 의존을 벗어나 자립에 이르도록 교육하고 지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안전의 염려로 억압해서도 안되고, 자유의 추구로 방치해서도 안된다. 그 과정 안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안전장치들이 마련되어야 하고, 간접적이고 직접적인 다양한 체험코스들이 연결되어야 하고, 시간과 시간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환경이 바뀔 때마다 인식의 공유와 소통의 기술이 촘촘히 이어져야 한다. “고집이 세다. 강박이 심하다. 열 번을 가르쳐도 모른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라고 문제만 나열하는 타인의 관점에 머물면, 그 속에 숨은 가능성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고집에 세다는 건 일관된 태도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강박이 있다는 건 규칙적 인지의 자원을 가졌다는 것이고, 열 번을 가르쳐서 나아지지 않으면 열 한 번째는 방법을 수정할 때이고,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시각이나 촉각 등 다른 감각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최근 발달장애인을 위한 쉬운 문서들이 바람직하게 제작되고 있는데, 강박적 특성을 가진 자폐성 장애인에게 아래의 예시들은 과연 쉬운 말일까 생각해 보자. 급식실에서, “밥을 적당히 푸세요.” 직장에서, “조금만 더 하고 쉬세요.” 평소 집에서 한 그릇 더 먹으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거나, 많이 먹을 때 칭찬을 받은 이들에겐 ‘적당히’가 ‘많이’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니, 비만이 염려되는 이라면 “한 주걱씩 푸세요.”라고 적정량을 말해주는 것이 더 쉽다. 직장에서 과로로 힘든 이에게 ‘조금만 더’는 막연한 시간으로 혼란스러울 수 있다. “10분만 더 하고 쉬세요.” 또는 “다섯 개만 더 포장하고 쉬세요.”가 정확한 예측과 안정감을 준다. 물론 사회에서 흔히 통용되는 언어들을 발달장애인에게도 자연스럽게 경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비장애인에게 ‘자연스럽고 쉬운’ 것이 발달장애인에게는 ‘부자연스럽고 어려운’ 과정일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밥 먹고 나니 배가 편안한가요? 한 주걱이 적당하군요.” 라고 ‘적당히’의 양을 경험한 후에 자연스럽게 반복해주고, “10분도 힘든가요? 그럼 5분만 조금 더 합시다.” 라고 ‘조금’의 정도를 시간으로 구체화하면 스스로 선택하고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숫자나 문자 인식이 어려운 발달장애인에게는 그림이나 색깔, 이모티콘 등을 제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감정온도계의 빨강(분노)-노랑(불안과 긴장)-초록(편안함) 색깔 위치를 가리킴으로 자신의 정서를 표현하거나, 스케줄의 흐름을 일일, 시간, 분당의 세분화된 그래프로 표시하고, 음식이나 물건의 양을 눈금으로 체크할 수 있다. 말하기나 글쓰기가 되지 않는 최중도장애라도 개별적으로 적절한 시각화 자료나 촉각적 도구 또는 습관적 표정과 행동패턴을 분석해 주변인들이 공유함으로써 소통이 가능하다. 발달장애인은 영유아기부터 성인기 평생교육까지 개인맞춤형 계획을 기본으로 하여 촘촘하고 반복적인 과정과 다양한 현장 경험을 거쳐 일반화에 이르게 된다. 특히 주변인들이 가장 난감하게 여기는 강박적 특성은 오히려 인지발달의 좋은 자원이 될 수 있는데, ‘언제(시간), 어디서(장소), 누가(대상), 무엇을(내용), 어떻게(방법), 왜(이유)’의 여섯 개 큰 가지 위에 일상의 반복과 변화를 잔가지로 더해 그려주면, 매일 겪게 되는 혼란스런 상황을 예측 가능하고 안정된 구조로 인식하고 스스로 선택하거나 수용할 수 있게 된다. 달력의 날짜로 봄을 인지하여 얇은 잠옷을 꺼내 입은 아들에게 3월은 봄이지만 눈이 내릴 수 있고, 겨울보다 추운 바람이 불 수도 있는 환절기임을, 밤기온의 숫자로 인지의 잔가지를 추가해 주었다. 아들은 잘 알아듣고 흔쾌히 도톰한 수면잠옷으로 다시 갈아입었다. 이러한 언어와 인지의 과정은 계속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반복되고 확장될 것이다. 오늘 밤 아들과 소통이 편안했으니, 내일도 그러하리라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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